[참조-1] (클릭)

주인공은 ‘자신이 떠나왔고, 떠나보낸’ 사람들을 향해 제사를 지낸다. 제사는 주인공의 발목을 잡고 슬픔이나 그리움, 후회의 감정을 더욱 부추기는, 그저 남겨진 자를 위한 의식이다. 끊겨버린 관계들에 애도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껍질을 붙들고 헤매는 행위인 것이다.

제사상 뒤켠에 마련된 병풍은 ‘널’이라고 불리며 여기엔 알 수 없는 숫자(떠난 이들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널’은 추후 주인공의 항해에서 뗏목 같은 역할을 한다. 어느덧 정신을 차려, 본인이 있는 곳이 고립의 섬임을 깨달은 주인공은, ‘널’을 배 삼고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간다.

외로운사람의 세계관 속 주인공은 끝없는 고립감이라는 감정 연료를 생산한다. 그 감정 연료는 ‘외롬섬’이라는 물체로 대변된다. 외롬섬들은 마치 장작처럼 타오르며 세계가 굴러가도록 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지만, 한편 주인공을 무자비한 자연 속으로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원인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모험 속에서 이러한 외롬섬들을 끊임없이 목격한다. 망망대해 위에서, 산에서, 들판에서, 동굴에서. 그는 자신으로부터 뻗어나가며 왜곡되고 꺾어지는 세계 속에서 여럿으로 분열되기도, 거인이 되기도 하며 심중의 갈피를 잡아나간다. 그 결과 외롬섬들은 주인공과 함께 화면에 남는다.

감정과 감각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외로움의 세계는 고유한 듯 보편적이다. 노 저어 나가는 삶, 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외로움의 세계가 존재한다.

조력자

주인공이 외로움의 세계를 더듬어 나가는 데에 가장 필요한 조력자는 바로 감각기관들이다. 생리학자 토마스 윅스퀼이 이야기한 것처럼, 모든 동물은 자신이 인지 가능한 공간에 필연적으로 어떤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원형집(움벨트) 안에 싸여 있다. 이 원형집 속 인지 가능한 환경의 한계는 주체가 가진 감각기관의 종류와 역량에 따라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외로운세계 속 주인공을 돕는 조력자들**―코로 보고, 눈으로 만지고, 귀로 핥는 덩어리들―**은 이러한 감각기관으로서 나침반 혹은 방향키의 역할을 하며 주체를 도와 함께 배를 끌어간다.

방해자

감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이 있다. 그것들은 열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한다. 경험과 기억은 감정의 사건들, 장면들이 중첩되면서 왜곡되고 편집된 것을 기반으로 한다. 감정은 인간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처음이다.

감정에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최대한 정리해보려 애쓴다.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그 파동에 휘둘리지 않으려 한다. 반대로 우리의 감정은, 그런 우리에게 휘둘린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란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그래서 감정이란 늘 피어나고 짓눌리고 새어 나오는 모양새가 된다. 외로움을 탐구하는 작업은 감정을 누르거나, 파격적으로 해방하기보다 감정과 함께 호흡하고, 감정을 수축과 이완의 동력 삼는 작업이다. 그래서 이 작업은 감정의 본래 성질이 휘둘림인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감정을 부정하고 가둘 때, 외로움은 슬그머니 그 철창을 빠져나온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주인공이 제사를 지낼 때 썼던 제기는 응축된 감정의 주머니로서, 세계 곳곳에 외롬섬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연료삼아 세계가 굴러가게끔 하는 주모자가 된다. 세계가 더욱 잘 굴러가게끔 하기 위해 주인공에게도 강한 힘을 가진 부정적 감정을 끊임없이 형성하고 내뿜을 것을 종용하고, 그것을 거부하고 항해를 지속하는 주인공에게 집착하며 계속해서 그를 방해한다. 그래서 본 이야기는 얼핏 (독소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세계를 구축하려는 자와 세계를 체험하려는 자 사이의 대립적 구도가 되기도 한다. 세계를 구축하는 자는 응축과 수렴, 그리고 발산과 같이 한 방향의 에너지에 집착하게 되지만 세계를 체험하는 자는 고유한 리듬을 가지고 모든 방향으로 나아가며,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다.